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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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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조희렴] “교회와 양을 지켜야 한다” 피란 대신 北으로

원산 순교자 조희렴 목사와 서울 남부교회

 

서울 남부교회 성도들이 지난 1일 이 교회 설립자 조희렴 목사 추도예배를 드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남부교회는 6·25전쟁 중 ‘원산 대탈출’을 감행한 원산 남부교회 성도들이 세운 곳이다.



서울 동대문 지하철역 1번 출구를 나서면 청량리 방향이다. 이 길은 늘 번잡하다. 출구 왼쪽으로 서울 시내 대표적 달동네인 창신동 일대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1번 출구를 중심으로 500m 내에는 네팔 러시아 등의 외국인 노동자, 고려인과 중국 동포를 상대로 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지난 1일 창신동 남부교회(윤교식 목사)를 찾아가는 길. 일부러 남부교회에서 1.2㎞가량 떨어진 동대문역부터 걸었다. 서울 동쪽인데 남부교회라는 이름은 의아했다. 남부교회는 1954년 4월 4일 창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소속이다.
 

전쟁 발발 후 국군이 원산을 접수하자 원산 남부교회 성도들은 비로소 크리스마스 대잔치를 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25일로 추정되는 당시 사진.



동대문역 1번 출구 앞은 한국근대기독교사에 남는 기독교 유적지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과 1892년 바로 이 자리에 보구여관 동대문분원 격인 볼드윈시약소를 설립해 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돌봤던 곳이다. 보구여관은 1887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다.

이 볼드윈시약소는 훗날 이화여대부속병원과 동대문감리교회가 된다. 하지만 이대병원과 동대문교회는 한양도성 성곽 복원에 따라 각기 서울 목동과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했다. 그 병원과 교회 옛터 위쪽으로 성결교 장자교회인 중앙성결교회가 자리한다. 이 교회는 1980년 시내 무교동에서 이전했다. 무교동 교회는 한국성결교가 시작된 곳이었다.

남부교회 역시 이러한 한국기독교사의 맥락을 이어온 역사적인 교회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남부교회의 뿌리는 함경남도 원산 남부교회다.
 

남부교회에서 본 창신동 낙산 자락. 맨 앞 건물은 남부교회가 섬기는 청소년 및 노인 시설이다.



남부장로교회 동대문감리교회 중앙성결교회의 공통점은 낙산 자락에 자리하고, 그 자락에 사는 도시 서민에게 영과 육의 양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창신동 충신동 숭인동 등을 꼽을 수 있다.

원산 순교자 목사, 68년 만에 동판 부활
이날 오후 2시30분 남부교회 대예배당에선 특별한 예배가 진행됐다. ‘순교자 조희렴 목사 기념예배 및 제막식’. 당회장 윤교식 목사가 올해 백수(白壽·99세)를 맞은 원산 남부교회 출신 김명옥 은퇴권사 등 원로들을 맞았다. 조 목사는 1950년 10월 9일 원산형무소 뒷산에서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고 그 시신을 김 권사의 큰아버지가 발견해 교회에 알렸다. 
 

지난 1일 창신동 남부교회에서 열린 ‘순교자 조희렴 목사 기념예배 및 제막식’. 유족들이 조 목사의 사진 등을 기증했다.



원로 참석자 대부분은 함경도가 고향으로, 6·25전쟁 직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가라 한다면 한달음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김 권사는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들이를 할 만큼 육신의 축복을 받았다. 원로들은 평안한 얼굴로 순교자를 추모했다.
 

조희렴 목사(1886~1950)



순교자 조희렴 목사(1886~1950). 함흥 출생으로 한국인 최초의 캐나다 유학생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동대문에서 가까운 미션스쿨 경신학교(경신고교 전신) 6회 졸업생이었고 연희전문을 거쳐 캐나다 댈하우지대학과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캐나다 동부 노바스코샤주 댈하우지대학은 한국선교사 윌리엄 존 매켄지(한국명 매견시·1861~1895)가 졸업한 곳이다. 조 목사는 매켄지의 약혼녀 루이스 매컬리(1886~1945)와 캐나다장로교 한국선교부의 주선으로 댈하우지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조 목사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유소년기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는 정도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분단으로 기인한 북한 기독교사 연구의 한계다.

그는 당대 드문 유학파 기독교 엘리트였다. 1914년에서 27년까지 캐나다와 미국 시카고대학 등에서 조직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귀국했다. 1920년대 그가 쓴 논문으로는 ‘인류사회가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진화론을 시인하여야 할까’ ‘여자의 사회적 지위’ 등이 있다.

조 목사가 기독교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함경도 지방 선교에 주력했던 캐나다장로교선교부와 그 선교부에서 파송된 매컬리 선교사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매컬리는 먼저 조선에 들어갔던 매켄지가 순직하자 동양 선교를 원했고 뉴욕에서 보수신학자 심프슨(사중복음 창시자)으로부터 선교훈련을 받은 후 1900년 무렵 원산에 도착했다.

매컬리는 조선 전도부인 등과 함경도는 물론 강원도 남부까지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1910년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딴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를 개교했다. 이 학교는 함흥 성진을 거쳐 원산에 정착했고 함경도 복음화의 거점이 됐다.

조희렴은 유학 중 매컬리의 메신저가 돼 캐나다장로교에 조선선교 강화의 필요성을 대변한다. 그리고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1927년 무렵 귀국해 한국 신학교육에 힘써 줄 것을 요청하자 함경도로 돌아온다.

그는 귀국 후 함흥 영생학교 교사와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 교수 등을 지내고 훗날 신학교 교장을 지낸다. 당시 영생학교는 김관식 목사(1888~1948·신학자)가 교장이었다.
 

동판 제막을 마친 후. 왼쪽부터 홍경모 장로, 백수를 맞은 원산 성도 김명옥 권사, 조희렴 목사의 자부 김혜신 사모, 윤교식 담임목사.



앞서 조희렴은 시카고대학 국제학생회장과 미국 내 한국유학생회장 등을 역임하며 리더십을 쌓았다. 이승만 박사와의 교제도 이때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함흥YMCA 총무 및 회장을 지냈고 해방 후 원산 부시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0년 8월 독일에서 제8회 만국면려청년대회(세계기독청년면려회)가 열리자 조 목사는 조선 기독교를 대표해 참석하는 한편 유럽 주요국과 러시아를 시찰한다. 이미 북미에서 기독교문명을 체험한 그는 면려청년대회 참석을 계기로 기독교교육을 바탕으로 한 농촌계몽과 사회계몽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신문에 ‘노동노국(러시아)발견기’ ‘북구견기’ 등을 연재했던 그는 사회주의혁명 과정 중의 러시아 방문 등이 문제 돼 함흥경찰서에 투옥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원산 석우동교회 유치원 설립 등을 통한 기독교교육운동을 맹렬히 전개한다. 또 1933년에는 조선주일학교대회장도 된다. 그는 식민 치하를 벗어나는 길은 예수를 중심에 둔 미래세대 교육이 답이라고 봤다.

원산 대탈출 교인들 부산서 천막교회
하지만 일제가 군국주의를 강화하면서 신앙교육은 위기를 맞는다. 1930년대 말부터 총독부가 선교사들을 탄압해 축출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선교부는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를 지키기 위해 조 목사를 교장으로 세웠다. 
 

월남한 성도들은 부산 천막교회를 거쳐 서울 남대문 장충동 등을 떠돌며 예배를 드렸다. 1962년 장충동 남부교회 시절의 주일학교 교사들.



1938년 무렵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평양신학교를 먼저 폐교했다. 조 목사는 신학교육을 멈출 수 없다며 송창근 김관식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설립을 추진한다.

1940년대 들어 일제의 발악이 거세지며 조 목사는 친미파로 분류돼 투옥된다. 석방 후에도 교수권 박탈과 학교 포기 강요가 이어진다. 또 각 교단이 해체되고 교회는 일본기독교회로 흡수돼 사실상 예배가 중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조 목사 등은 흩어진 성도들을 모아 원산 남부교회를 세웠다.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교인들이 남부교회 이름 아래 모인 것이다.
 

1966년 지금의 남부교회 터에서 예배당 기공식을 올린 후 기념촬영 한 모습. 뒤로 서울 대학로 뒤편 낙산 자락을 메운 집들이 보인다.



1945년 8월 해방. 그러나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갈렸다. 한때 남으로 피신했던 조 목사는 교회와 양을 지키기 위해 다시 원산으로 갔고 조만식 선생과 조선민주당을 이끌며 공산당에 저항한다. 서울 피신 당시 이승만 박사로부터 정치 참여를 제안받았으나 북한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보고 거절했다.

그는 공산 치하에서도 남부교회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공산당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면서도 그를 원산형무소에 가뒀다가 여론에 밀려 풀어주기도 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했고 그해 10월 국군의 원산 입성이 코앞에 이르자 예비 검속돼 10월 9일 원산형무소 뒷산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총살형을 당했다. 이 집단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가 한준명 목사다.

한편 원산 남부교회 교인들은 국군이 주둔한 1950년 크리스마스를 예배와 찬양으로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1·4후퇴가 다가오면서 월남을 강행해야 했다. 홍진상(현 남부교회 은퇴장로) 등 성도들은 목선과 LST 등을 얻어 타고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며 부산에 도착했다. 

그 엑소더스에 감사해 부산 용두산 자락에 천막을 치고 ‘원산 남부교회’라는 성전 간판을 걸고 감사예배를 드렸다. 조희렴 목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강한 사모 박금려(1899~1988)
정신여학교와 오사카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관서교회 전도사를 지냈다.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 및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여전도회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루이스 매컬리 교장의 주선으로 1932년 원산 석우동교회에서 조희렴 목사와 결혼했다. 
 

박금려 사모(1899~1988)



유대인식 육아법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함남노회 여전도연합회 서기 및 회계로 헌신했다. 순교한 남편의 시신을 찾아 원산 광석동에 묻고 세 아들과 함께 월남해 부산 피난민공동수용소, 제주도, 서울 등지에서 집도 없이 살며 남편의 뜻을 이었다. 

조 목사가 북한 정권에 협조했다는 오보를 바로잡느라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장남 조현규(2003년 작고) 목사는 남부교회와 성결교에서 목회를 했다.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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